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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갤러리

클레오파트라

깸뽕 2022. 1. 5. 16:44

영국 John William Waterhouse / 클레오파트라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여자가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곧 마녀, 폭군, 남성편력, 권력귀신, 미인계라는 프레임을 일단 씌우고 시작하는 것이 동서양 구별 없이 세계사의 서술 방식입니다. 대통령제에서 4~5년을 제대로 통치하기도 힘든데, 그 오랜 세월(20년) 항상 물산이 풍부해 로마를 비롯한 주변 세력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이집트를 그렇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단 하나 잘못한 거라면 로마의 식량창고 역할만 했지, 식량을 무기화해서 국제 정세에 대처하거나 이를 지킬만한 힘을 키우지 못했다는 거. 물론 클레오파트라 집권기만의 문제는 아닌 오래된 일이죠.

#4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더가 정복전쟁 중 후계구도 없이 젊은 나이에 사망(BC 323년, 바빌론) 하자 제국은 이집트 지역,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 지역, 시리아 지역으로 분할되었는데 그중 이집트를 차지한 것이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입니다. 왕조의 시조가 되는 거죠. 이때부터의 이집트는 원래의 북아프리카가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후예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람세스 때와는 다르죠.

 

따라서 이 왕조의 지배층 문화는 이집트 고유문화+그리스 문화요, 언어도 그리스어를 사용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인구가 지배층으로 왔으니 왕가의 혈통과 왕위 보존을 위해 근친혼을 많이 하게 된 거죠. '지 동생 잡어 먹은 x'이 아니고요,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이런 표현이나 쓰고 앉았으니...

기원전 50 년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클레오파트라 7세)는 역사상 그 어떤 왕보다 치열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습니다. 남동생과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생존과 왕권을 위해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하여 권력을 쥐게 됩니다.

역사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이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정략적 결합(이를 주로 유혹이라고 함) 하여 정치적 목적과 이집트의 안전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일 겁니다.

Cleopatra_bust. 46–44 BC / British Museum

▣ 클레오파트라, 민족의 영광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2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두 언니 외에도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기원전 51년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위에 즉위,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여덟 살, 동생은 열 살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언어 천재였다. 어릴적부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놀이터처럼 즐기던 그녀는 그리스어, 로마어뿐만 아니라 민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주민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집트 고유어, 시리아어까지 익혔을 뿐 아니라 이집트 문화와 신앙, 전통을 이해하고 존중하여 자기를 이집트 신(이시스) 들과 결부시켰다. 학술토론회에 참가하며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민족의 영광'이란 이름의 뜻과 같이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이집트의 영광을 되찾는 일이었다.

Frederick Arthur Bridgman

Cleopatra data-on the terraces of Philae / 1896

클레오파트라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는 로마의 위협(합병) 속에 이집트의 독립을 유지하는 일과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사이에는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BC 48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이런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사르(시저)의 막강한 힘을 빌려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타고난 지성, 재능으로 능란한 외교를 벌인 끝에 이집트를 '동맹국'으로 선언하게 만들고, 나아가 불안한 자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저가 피살당하자, 이번에는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로마에 대항했다.

▣ 클레오파트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프랑스 고전주의 제롬 (Jean-Leon Gerome)

Cleopatra before Caesar. 1866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B.C.102-44)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스스로 양탄자 속에 누운 뒤 양탄자로 둘둘 말아 시저의 방으로 들어가 펼치니 그 안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의 정치력과 미모에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도록 도왔다.

시저의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 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피살된 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 권력자였다.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Giovanni Battista Tiepolo / The Banquet of Cleopatra And Antony

시저 사후 삼두 정치의 한 명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와의 정략적 제휴를 위해 묘안을 짜냈다.

 

기원전 41년 안토니우스는 삼두정치 반대파를 도와준 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으로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소스(Tarsos, 터키)로 소환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몇 번의 독촉을 받은 끝에야 타르소스로 향했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 The_Meeting_of_Antony_and_Cleopatra

황금빛 선체에 거만하게 기대앉은 여인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다. 아름다움의 절정에 다다른 스물아홉 살의 클레오파트라, 이 화려한 첫 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후 10년이 지났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키프로스, 리비아, 시라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 한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중의 여왕'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Cleopatra's Gate in Tarsos (터키, 첫 만난 BC41 장소)

▣ 옥타비아누스의 부상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국사를 돌보기는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왕에게 몽땅 안겨주는 매국노..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카이사르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 악티움 해전

 

기원전 31년 그리스 동쪽 해안의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연합 함대 간의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참패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로마에 끌려가 웃음거리가 되느니 자결을 택했다. 자기를 안토니우스 옆에 묻어 달라는 편지를 남긴 채, 기원전 30년의 일이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안토니우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클레오파트라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여왕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무너지고 이집트는 로마에 합병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후한을 없앤다는 명목하에 모두 처형되었다.

Guido Cagnacci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1658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탐스러운 무화과 바구니를 들고 온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고 기록하며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라고 의문을 던졌다.

화가들은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 독사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타나토스와 에로스)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하자.

 

 

프랑스 고전주의 알렉산드르 카바넬 (Alexandre Cabanel)

Cleopatra Testing Poisons on Condemned Prisoners. 1887

 

▣ 팜므 파탈 원형 만들기

<영웅전>을 쓴 로마의 전기작가 플루타르코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안토니우스를 파멸시킨 교활한 '나일강의 세이렌'이라고 부른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남자의 일생을 망치는 요부, 혹은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콧대 높은 여자의 대명사로 2천 년 넘게 선망 섞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사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쪽팔리기 짝이 없다. 누가 뭐라 해도 로마제국의 시원이 된 카이사르가 그녀에게 빠져 그 아들을 로마의 후계자로 삼고자 했을 정도였고, 영웅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조국 로마에게 칼끝을 돌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니까. 때문에 로마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클레오파트라를 평가절하했고, 그와 견해가 다른 이집트 측의 자료나 기록들을 없애 버렸다.

프랑스 상징주의 귀스타브 모로

 

 

로마인들은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로지 새끈한 미모를 무기로 남자를 유혹해서 욕망을 달성한 여인으로만 남겨놓았다. 그러면 제대로 미모를 표현해 주덩가.. 로마의 동전과 조각에는 무슨 쭈구렁탱이 마귀할멈으로 그려놓고는^^ (근데 그런 그녀에게 미쳤다고 두 영웅이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을까?? 로마에는 미인이 지천에 깔렸을 텐데)

 

 

셰익스피어 시대로 넘어오면 여기에 더해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백인 장군에게 뻑이 간 황색 미녀'로 치부해 버렸다. 요부+오리엔탈리즘의 편견 속에 놓이게 했다.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으로 기원전 30년 39세의 나이에 죽은 클레오파트라는 타락과 교활함과 함께 이국적인 외모로 유명하다. 심한 매부리코에다 큰 입을 가진 그녀는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와 뛰어난 화장술, 우아한 자태, 그리고 천사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녀의 성욕은 역사상 어느 여인보다 뛰어나 하룻밤에 100명 이상의 로마 귀족을 상대로 변태적인 성행위를 한 날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00일보” 1996년 7월13일자. 설00<의학전문가>)

Cleopatra_VII / marble / Vatican_Museums

이 정도면 (이집트 정부가 안다면) 과히 소송감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정보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왜곡, 조작된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 클레오파트라는 강대국 로마에 맞서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고 애쓴, 야심만만하고 '탁월한 정치가'로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사료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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