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화랑, 갤러리

레이턴과 부게로

깸뽕 2021. 1. 5. 12:10

 

The Painter's Honeymoon

1864. Oil on canvas, 63.8 x 77.5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로드 프레데릭 레이턴 (Lord Frederic Leighton, 1830 ~ 1896)

19세기 영국 고전주의 화가 레이턴 경(Lord)이 그린 '화가의 허니문'은 신혼시절의 감미로움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화가는 캔버스 위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고, 신부는 그것을 보려고 몸을 화가 쪽으로 기울여, 햇빛을 듬뿍 머금은 아내의 장밋빛 체향이 그림 속에서 묻어나오는 듯합니다. 더없이 하얀 아내의 손을 쥐고 아내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부드럽게 구부러진 여인의 손가락이 관능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The Golden Hours

186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아직 미혼인 화가가 서른셋쯤에 그린 작품입니다. 보는 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평온한 신혼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해 흐뭇합니다. 남자는 화가 자신일까.. 그러나 레이턴 경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은 집안, 화가로서의 성공 가도, 부와 명예,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유창한 외국어 실력, 화가 최초의 기사 작위.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였지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너무 완벽해서 결혼을 못 했다는 것이 정설인 듯합니다.

Demeter( 또는 Return of Persephone)

1891. Oil on canvas. 80 x 60 inches (203.2 x 152.4 cm)

Leeds Museums and Galleries, England

 

지하의 왕, 하데스에게서 벗어나 엄마인 데미테르(대지의 여신)의 품으로 안기는 페르세포네. 모델은 도로시 딘이라는 여인입니다. 부모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도로시는 어려운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레이턴 경의 집으로 들어오는데, 마침 이 그림은 그러한 배경을 설명하는 듯합니다.

'도로시'의 생활을 후원하며 그녀의 어린 동생들도 집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도록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후견인으로, 화가와 모델로, 그의 그림에서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물론 결혼은 안 했지만, 둘은 사랑한 사이였죠.

Flaming June

1895. Oil on canvas. 120.6 x 120.6 cm

Museo de Arte, Ponce, Puerto Rico

 

역시 도로시 딘이 모델입니다. 오페라의 유령 등으로 유명한 음악가 <앤드루 웨버>가 가난했던 청년 시절 이 그림을 거리의 쇼윈도에서 보게 됩니다. 당시 50파운더(약 70~80만 원)에 걸려 있었지만, 한참을 보고 아쉽게 발길을 돌립니다. 돈이 없었죠.. 이후 이 그림은 경매에 150달러 정도에 나오지만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그 후 푸에르토 리코의 한 미술관에 영구 보관하게 됩니다. 그림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웨버는 음악가로 성공하고 미술관을 찾아 100억을 제시했지만, 영구보관 작품이라 팔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옵니다. 대가의 이 그림이 150달러에도 낙찰이 안되었다니...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 ---

Fardeau Agreable ( Not too Much to Carry)

1895. Oil on canvas. 44 x 29 7/8 inches (112 x 76 cm)

Private collection

윌리엄 부게로 William-Adolphe Bouguereau(프랑스, 1823~1905)

조용한 시골에서 일을 하다 동생과 집으로 향하는 중인가 봅니다. 응석받이 동생은 그냥 언니가 좋나 봅니다. 업고 가는 언니나 업힌 동생도 지친 기색 없는 미소가 저절로 흐뭇한 웃음이 입가에 멤 돕니다. 실제 이 그림을 위해 화가의 자녀들이 모델이 되었습니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소녀들의 눈길, 완벽한 구성, 아이들의 다리와 팔의 위치와 각도, 부게로가 추구하던 아카데미즘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한 그림이네요.

L'admiration : Admiration.

1897. Oil on canvas. 147 x 200 cm

San Antonio Museum of Art, San Antonio, Texas, USA

부게로가 없는 19세기 파리의 화단?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신고전주의 다비드와 앵그르의 뒤를 이어 19세기 프랑스 화단을 이끈 부게로의 아카데미 화풍으로 충실하게 그려진 인물과 배경은 사진처럼 사실적이며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림을 그리기 전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공부하고, 인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리고 무수히 많은 데생을 통해 얻은 노력의 결과겠죠. "나는 예술에서 아름다운 것만을 보며, 나에게 예술은 아름다움이다"라고 말하며 회화의 이상주의를 주창한 부게로.

 

 

The Abduction of Psyche,

1895,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부게로는 주로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로 그림을 그렸으며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의 아카데미 회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입니다. 에콜 보자르의 앵그르의 문하로 공부하며, 1850년에는 '로마상'으로 4년 동안 로마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에 돌아와 주제와 세부 묘사에 독보적인 실력으로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당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성공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Les Noisettes : The Nut Gatherers.

1882. Oil on canvas. 87.5 x 134 cm

Detroit Institute of Art, USA

 

-- ---

비록 영국 화가 레이턴은 프랑스의 윌리엄 부계로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화풍도 비슷하고 고전에 충실한 극사실적 인물 묘사나 여인을 아름답고 신성하게 묘사하는 아카데미적 전통을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생전에는 엄청난 특권적 위치에 있었으나 한 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되었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레이턴의 Nausica // 부게로의 Douleur d'amour. 1899

 

두 그림은 슬퍼 보입니다. 떠나는 오디세우스를 아쉬워하는 나우시카(왼), 그리고 큐피드가 울고 있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름에 빠져 있다. 무언가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 그리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고통이 알알이 그려져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레이턴의 최고의 명작이라 일컫는 그 찬란한 <Flaming June>은 어떻게 150달러에도 사지 않는 키치로 전락되었을까요? 프랑스 국립 미술원의 종신회원으로 벨기에와 스페인에서 명예 작위까지 받을 만큼 동시대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부게로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요?

레이턴경의 페르세우스 /Perseus on Pegasus Hastening to the Rescue of Andromeda

1895-96. Oil on canvas

Leicesetershire Museums, Arts and Records Service

19세기 후반,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 북유럽 등 전 유럽에 몰아친 아방가르드 물결입니다. 인상주의로 시작된 물결은 상징주의, 표현주의, 쇼비즘, 큐비즘 그리고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파고 속에서 고전주의 미술은 사막의 모래폭풍에 잠긴 도시처럼 수면 아래로 영원히 잠긴 듯했습니다.

윌리엄 부게로 Jeune Bergere (Young Shepherdess.)

1885. Oil on canvas laid down on board. 157.5 x 72.5 cm

San Diego Museum of Art, San Diego, California, USA

Fred Ross(ARC 회장)라는 미술전문가는 1977년에 Clark Museum에서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러 갔다, 미술관 한 쪽 구석에서 처음으로 부게로의 작품 보게 됩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가진 자신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본적도 없는 그림.. 서명을 쫓아 자료를 찾아보니 생전에 엄청난 경력을 가진 화가가 어떻게 철저하게 묻힐 수 있는지,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현실에 그의 그림의 가치를 아는 사람도, 자료도 찾기 힘든 상황에서 부게로에 대한 연구가 시작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림과 문헌을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 이런 일이 '부게로'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레이턴 경. Icarus and Daedalus. 1869. 138 x 106.5

알렉상드르 카바넬, 미소니에, 레옹 레르미트,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존 밀레이, 번 존스, 로렌스 알마 타데마, 프랭크 딕세 등... 새로운 물결 속에 19세기의 고전주의 화가들이 묻혔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물결에 핍박받고, 폄하되고, 조롱되어 오랫동안 잊혔지만 마침내 박물관 구석에, 먼지 쌓인 창고에, 개인의 다락방에 처박혀 있던 그들의 그림들이 먼지를 털어내고 긴 수면에서 깨어나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미술사의 위대한 거장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부게로 / Le Repos : Rest.

1879. Oil on canvas. 164 x 107 cm

Cleveland Museum of Art, Cleveland, Ohio, USA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